외 애 않낳조?

어른이라는 건 꼰대들의 질문 스무고개에 모두 긍정의 답을 해야 비로소 부여받는 자격증 같은 건가 보다.

졸업과 취업, 그리고 그 다음단계는 결혼이다.

여기까지 Yes를 외쳤다면 ‘기특하다’는 코멘트를 받지만, 이제 남은 것은 부정의 시간 뿐이다.

“애는?”

“없는데요.”

“안 낳을 거예요?”

“네.”

“남편도 동의했어요(정말 여기까지 물어볼 줄은 몰랐다)?”

“네.”

 

단답형의 답은 곧 ‘당신과 이 주제로 더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음’을 뜻하지만, 세상물정 모르는 꼰대들에게 눈치까지 요하는 건 무리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비뚤어진건 아니다.

초반에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음’으로 인지해 비출산의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고민을 타인과 나눌 필요는 없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질문을 시작한 10명 중 9명은 나의 대답을 불편해했다.

그렇다. 꼰대란 기본적으로 남의 말을 안 듣거나, 원하는 답을 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집단이다.

그런 그들에게 이유를 말해야 ‘개그로 던진 말을 다큐로 받아치는’ 싸하고 찝찝한 분위기로 종결될 뿐이다.

 

애초에 이유를 궁금해 하지 않고 던지는 질문임을 깨닫고 말을 아끼게 된 뒤로부터는 힙스터 취급을 받는다.

“그래, 나도 젊을 땐 뭘 몰라서 그랬지.”

‘자유로운 영혼’ 아니면 ‘뭘 모르는 이기주의자’의 잣대.

나의 정체성이 둘 중 하나로 퉁쳐진 다음엔 약속된 연설이 뒤따른다.

요약하면 이렇다. 아이가 주는 정서적 행복이라든지, 힘든 육아를 해낸 본인의 정신적 성장, 애가 없으면 유지되지 않을 부부생활, 블라블라블라…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상대에게 출산을 권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할 이야기를 자랑스레 하는 그들이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내 나이는 서른하나다.

무례한 사람들은 벌써 ‘노산’을 걱정하는 말을 던지곤 하지만, 아직도 내 친구들 중에는 기혼보다 비혼이 더 많다.

결혼이나 연애 이전에 집이나 인간관계까지 포기한다는 내 또래 청년들의 이야기가 몇 년 전부터 많은 미디어에 꾸준글로 도배되고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만나는 꼰대들에게는 그저 공허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왕 이야기를 꺼낸 김에 굳이 말 하자면 나 역시 아이와, 아이를 낳는 사람의 결정을 존중하며 아이와 함께하는 삶이 불행보단 행복한 일이 더 많을 거라고 믿는 편이다.

그래서 그만큼 되묻게 된다.

나는 그 아이의 부모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경제적, 물리적, 심리적 여유는 대체 얼마나 더 살면 얻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그런 것들을 애써 구축해놨다 해도 나는 내 아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이 더 많다.

당장 가난 같은 건 집어 치우더라도 내가 충분히 경험해서 아는 나도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환경오염이라든지, 시간이 지난다고 개선되지 않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 같은 것 말이다.

배운거라곤 폭력과 줄세우기가 대부분이었던 끔찍한 공교육도 도저히 개선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결혼까지 세상이 부여한 모든 미션을 다 통과한 결과는 또 어떤가.

구직장에서 나의 퇴사 결심을 굳건하게 만든 선배에게는 “면접 때 애 안 낳겠다는 말 진심이지?”, “아니, 회사 입장에서는 네가 들어온지 3년도 안 돼서 애를 낳으면 손해 아니겠어?”, “그러니까, 피임은 잘 하고 있지?” 를 삼연타로 듣기도 했었지.

있지도 않은 아이에 대한 무례한 질문 폭격에도 전부 “네…” 라고 답할 수 밖에 없던 나는 이 사회에 내 아이를 밀어넣어, 내 아이가 약 30년의 삶을 나와 비슷하게 보내게 된다면 부모로서 너무나 가슴 아플 것 같다는 생각 뿐이다.

 

이런 나에게 비출산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투쟁이 아니다(설령 투쟁이면 어떻겠냐만).

이건 무력감이다. 희망고문하지 않겠다고 나를 달래는 일이다.

그리고 감히 장담하건데, 나같은 사람이 정말 많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진지한 걱정이나 고민이 아니라면 타인에게 함부로 질문하지 말지어다.